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전투의 시작 === 운명의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아침, 날씨는 맑았다. 이윽고 초병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왜선들이 접근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이에 이순신은 좌선[*좌선 기함, 대장선을 이르는 조선 시대 군사 용어]을 포함한 13척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나섰다. 이순신은 일기 기록에서 '전투원인 병사들이 왜군 규모를 보고는 겁을 먹어서 얼굴빛이 많이 질렸다고 하였고,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부드럽게 타일렀다.'고 당시 상황을 남겼다.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이 나아와 보고하길, "수없이 많은 적선들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 하였다. 바로 뭇 전선에 명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아군의 뭇 전선을 에워쌌다. >---- >『정유일기』 9월 16일 울돌목 앞바다에서 참으로 보잘것없는 조선 수군의 잔존 전력과 조우한 왜군 함대는 곧장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자신하듯이 포위진을 짜고 돌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자랑하는 유인섬멸전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돌격해 나아갔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조선 군선들도 이에 맞춰 함께 전진해 나가며 판옥선의 체급과 울둘목의 유리한 지형을 믿고 함께 함대를 구성해 싸워야만 했는데, 아군의 12척이 겁을 먹어 전진하지 않으므로 대장선만 적진으로 돌격하며 활과 포환을 마구 쏘아대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일본 측의 지휘관이던 [[도도 다카토라]]는 전투의 시작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すいえん(水淵)と申す所にはん舟(番船)大しやう(大小)分十三そう(艘)い(居)申し候。大川の瀬よりはや(早)きしほ(潮)のさし引き御ざ(座)候所の内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潮のやわらぎ)申し候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舟居)申し候。 それを見附け、是非ともとり申すべきよし、舟手衆と御相談にて、則ち御取懸り成され候。 大舟(安宅船)にてハいまのせと(瀬戸)をこきくたし(漕ぎ下し)候儀ハ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関船)を御そろへ成され、御かゝり成され候」。(『高山公実録』) >---- >스이엔(수연)[*주석 수연이라는 지명은 다른 지도에 보이지 않으며 수연이라는 것은 웅천의 옆 땅을 말하는 것이라. 정한위략, 나베시마 가기(家記)를 인용하였다.]이라는 곳은 대소 판옥선이 13척 있었다. 큰 강의 하구에서 빠른 물결이 들고 나다가 잠시 물 흐름이 약해진 사이에 13척이 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하고 반드시 무찌르자고 수군들이 다짐하며 즉각 돌진했다. 대선(아타케부네)로는 이 좁은 물목 사이로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판단하여 다들 세키부네로 통일해 전투에 임했다. <고산공실록> 일본 측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함대 13척을 보고 바로 승리를 확신했다는 점, 물목이 좁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고 비교적 작은 세키부네로 갈아탔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명량 해협의 조류에 대해 기록을 따로 남겼다는 것이다. 일본측 지휘부는 물결과 적의 규모를 보고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일제히 돌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